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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근대적 교육관

by 정 그릿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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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애

 루터는 독일 작센에서 1483년에 태어나 1546년까지 살았던 수도원 수사이자 신학자이었다. 그는 당시 일반 가정들처럼 경건하고 엄격한 종교적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1501년 루터는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학생 수가 많았던 에르푸르트대학교 인문학부에 등록했다. 학창 시절 오랫동안 심각하게 말하는 버릇 때문에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1502년 그는 일반 인문학부 과정을 이수하여 문학사 학위를, 1505년 17명의 이수자들 가운데 2등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루터가 가입한 2000개 이상의 지회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1506년 수사로서 서원을 했고, 1507년 사제 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그가 만년에 쓴 <식탐 담화>에 따르면 1505년 7월 2일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 슈토테른하임 마을 근처에서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 공포에 휩싸여서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수사가 되겠나이다."하고 외쳤다고 한다. <수도 서약에 관하여>(1521)라는 글에서 "내가 수사가 된 것은 자유롭게 결정한 것도 아니고 원해서도 아니었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고뇌에 휩싸여 어쩔 수 없이 서약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에서 많은 활약을 하여 1515년에는 다른 11개의 수도원을 통괄하는 지역 관할 지도신부가 되었다. 그는 실제적인 행정과 목회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거은 루터에게 귀중한 체험이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야의 서신들은 훗날 독일 교회들과 궁핍한 영혼들의 치유에 큰 도움이 되었다. 

 루터는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하고자 1508년 비테베르크대학교(1502년 창설)에 입학했다. 이 대학교는 활기에 넘치고 진보적인 학교였다. 1509년 3월 루터는 이 대학교에서 성서학사 학위를 받고 그다음 단계의 학위, 곧 명제집 정통자 학위를 받기 위해 에르푸르트로 되돌아갔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루터는 1517년 10월 95개조 명제에서부터 시작하여 1521년 제국의회에서의 도전, 1525년 농민전쟁에서의 영향 등 올바른 신앙을 촉구하면서 교회 개혁과 사회개혁을 위한 수많은 저서와 논문 그리고 실천적 활동을 벌였다.

 루터는 그가 태어난 아이슬레번에서 1546년 과로로 사망했다. 

 

 2) 루터의 종교관

 루터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십자가 신학', 즉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계시를 강조하는 신학이었다. 루터에 따르면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교도들이 고난과 유혹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질 필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루터가 생각하는 기독교 복음으로서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은혜 곧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죄사함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고, 죄사함을 받고 깨끗해질 때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며, 죄의 멍에서 벗어난 영혼은 즐겁고 자발적이고 창조적으로 하느님께 복종하면서 인간은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평민들을 위해 성서를 알기 쉽게 해석했으며, 성서를 알기 쉽게 해석했으며 성서를 평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연결시켰다. 그는 성서를 번역하면서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라는 구절에서 '믿음'이라는 낱말 다음에 '오직'이라는 낱말을 덧붙였다. 독일어로 본래 뜻을 충분히 전하려면 그 낱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오직'이라는 낱말은 당시 성직자 중심의 종교 세계를 하느님과 개인의 종교적 관계는 믿음으로만이 '오직' 가능하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즉 하느님을 믿는 자 중심으로 관계를 설정하여 기독교의 인간화를 촉진하려는 루터의 종교개혁 의지가 깊이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면죄부사건과 교회 개혁 

 1476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교황의 권한을 연옥의 영혼들에까지 확대하였다. 이는 교회 세력에게 탐욕과 공포심을 이용하려는 속임수와 면죄부와 관련된 허세와 화려한 격식, 그리고 면죄부 판매자들의 심각한 잇속 차리기 등으로 변질되어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교회의 부패를 공박한 루터의 95개 조항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촉진시켰다. 본래 면죄부의 성격과 범위는 중세 후기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면죄부는 돈을 지불함으로써 죄로 인해 현세에서 받아야 할 징벌의 일부, 곧 고해성사 때 신부가 부과하여 시제로 치러야 할 고행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이 경우에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참회해야 하며 사제에게 사면을 받아야 했다. 면죄부는 교황의 권위로 위임받은 사람들을 통해 사들일 수 있었다. 면죄부가 하느님의 죄사함을 사고팔 수 있다거나, 참회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다는 취지로 통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가 중세에 교황청의 재정이 점점 어려워지자 교황청은 자주 면죄부 발행에 의존했기 때문에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 가문인 후거가(家)는 신성한 어음인 면죄부 유통을 감리해야 했다.

 루터는 면죄부의 오용을 공격하는 설교를 자주 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면죄부에 저항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특권을 부여하는  희년(禧年) 면죄부였다. 이 면죄부의 표면적인 목적응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중수하는 것이었지만 수익금의 절반은 마인츠의 대주교인 젊은 알베르트에게 흘러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고위 성직으로 빨리 승진했고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큰 빚을 지고 있었다.

 루터는 '진리를 이끌어낼 목적으로' 95개 조항을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 교회의 문에 붙였다. 그날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전날 밤이었고 그곳에서는 성인들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루터의 95개 조 조항은 잠정적인 견해였으며, 연옥의 교리와 같은 기존의 교설들을 공격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영적, 내적 성격을 주로 강조했다.

 95개 조항에서 참회는 그리스도교도의 전인적 삶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첫째 조항과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가장 거룩하고 영광된 복음과 하느님의 은혜라고 주장한 62번째 조항은 루터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통해 하늘에 들어가는 일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거짓 평화, '평안'을 공격했다. 당시 발전하기 시작한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95개 조항 사본들은 먼 지역까지 널리 유포되었고, 그리하여 단순한 국지적 문제일 수도 있었던 그의 주장은 점점 더 넓은 범위에서 논의되어 공개적으로 쟁점화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교황청에 소환되기까지 하였다.

 루터는 결국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1520년 파문당하고 황제 카알 5세는 그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루터는 작셈의 영주인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보호를 받으며 10개월에 걸쳐 성서를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성서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민 모두가 모국어만 알면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기독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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