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학

제2장 중세의 교육 1. 시대적 상황

by 정 그릿 2021. 12. 21.
반응형

 중세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395년 경부터 르네상스 운동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로마 제국 해체 이후 유럽을 하나의 거대한 그리스도교 왕국으로 세우려는 중세의 이상은 성직자와 세속 통치자 간의 공통된 철학이었다. 이론상으로 이 두 집단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서 각기 인간의 정신적 요구와 세속적 요구를 충족하는 역할을 했다. 이중 첫 번째 영역에서는 교황이 지상권을 행사하였으며, 두 번째 집단에서는 황제가 행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두 권력이 서로 끊임없이 분쟁에 직면하거나 반목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배권력의 유지와 확대라는 공동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야합하였다. 예컨대 교회는 군대를 소유하고 국정 문제에 간섭하면서 기독교 파문을 지배 도구로 삼아 황제의 지위를 박탈할 권리를 주장하였고, 반면에 황제는 성직 임명권과 교리 문제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자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십자군 전쟁과 같은 사건을 통해 상부상조하는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중세의 정신은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로마의 귀족중심의 정치, 경제로 인한 타락된 사회적 윤리적 요소이고, 둘째는 권력화 되고 교권 정치화된 기독교 교회적 요소, 그리고 셋째는 북방에서 내려와 로마제국의 세력을 침식한 게르만족의 봉건적 요소이다.

 이들 중 사회적 통일성의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은 로마 카톨릭 교회뿐이었다. 따라서 중세는 기독교의 정신적인 기반 위에 계급적 정치구조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모순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 기독교의 지배 이데올로기화

 중세 초기에 인간의 관심은 기독교적 신에 집중하였다. 로마 말기적 증세, 즉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소외, 평민들의 삶의 고통,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의 약탈,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의 애환 등을 경험하면서 중세의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구원을 소망하였다. 그들은 오직 신만이 그들을 해방시켜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신을 생각하였고, 신에 대해 연구하였고, 그의 의지를 확증하고 그것에 복종하고 기도하였다.

 중세인들의 삶은 서구 역사상 전례가 없는 신 중심적인 것이었다. 중세의 철학과 학문과 사회 전반은 언제나 신학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세의 철학은 신학이 대신하였고, 인간중심이 아닌 신중심의 시대이었으며, 인간 이성의 힘이 발휘되기보다는 신앙의 힘이 우선시 되었다. 더 나아가 교황 세력과 영주 세력들은 기독교적 하느님을 자신들의 권력 확대와 통치력 확보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키기도 하였으며, 이에 대항하고 부정하는 세력들은 가차 없이 신의 이름으로 처단되었다. 신중심의 중세에 형성된 서구의 지배세력들은 기독교와 야합하여 이후 지배와 피지배의 유럽사 전반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배권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인간 역사에서 인간 대신에 신이 중심이 된 중세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창의적 지식과 이론과 학문이 발전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이러한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불렀다.

 다만 한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중세는 기독교 사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인본주의 사상과 문화, 게르만족의 봉건제 등이 기독교 사상에 융합되어 중세의 새로운 신의 왕국 건설이라는 이상을 형성하였다. 

 

  나. 봉건제적  주종관계

 기독교적 지배이데올로기와 함께 서구 중세 사회를 지탱하게 했던 사회제도는 봉건제이다. 봉건제는 근세로 넘어오기 전 비민 주화된 시대에서 동, 서양을 불문하고 채택된 사회제도이다. 그래서 봉건시대 혹은 봉건사회라고 부른다. 

 봉건사회는 폐쇄적인 농업경제에서 번성한 문명의 한 형태이다. 즉, 절대적인 힘을 가진 왕의 권한을 견제하고 권력 분점을 원한 영주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성립된 정치 경제제도이고, 이 제도를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양자의 의무, 권리 등 삶의 형태를 규정한 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봉건제는 봉신들의 영주한테서 받은 봉토를 보유하되, 그 대가로 영주에게 특정한 봉사를 해야 하며 개인적인 충성으로 영주와 주종관계를 맺게 된다.

 중세시대 봉건제도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8세기경 토지 소유권을 가진 왕들은 봉신과 농노에게 토지의 이용권과 개발권을 부여했다. 9세기를 거치면서 봉신과 농노에게 토지의 이용권과 개발권을 부여했다. 9세기를 거치면서 봉건제는 더욱 발전하여 유럽 전역과 교회에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특히 교회의 봉건화로 세속 영주는 주교와 대수도원장들에게 성직과 재산을 주었고, 그 대신 주교와 대수도원장은 세속 영주에게 군사적  보상뿐만 아니라 신앙적 봉사를 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봉건제가 정착된 중세사회는 군주와 개인적인 주종관계 속에서 수행해야 할 의무가 규정되어 있다. 봉토를 받은 이들은 이를 자손에게 불려줄 수 있으나, 자유가 없는 소작농에 대해 영주는 광범위한 경찰권과 사법권 및 과세권을 갖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켰다. 

 '영주는 영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라는 원칙을 지키는 봉건적 주종관계에서 영주는 12~13세기 르네상스 출범기에 자신의 권익을 상실하게 된다. 이 시기에 출현한 지방 시장권의 형성, 교환경제의 발전, 중세 도시의 성립 등으로 장원제가 해체되고, 영주는 권력을 잃고 단지 지주의 지위로 전락하면서 다시 정치권력은 절대군주에게로 집중하게 된다.

 봉건제가 역사 진행과정에서 인간존중의 측면에서 긍정적이었느냐 부정적이었느냐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봉건제가 권력의 분산화의 측면에서 볼 때 권력의 집중화보다 발전된 제도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철저한 계급사회를 정당화하고 그 정당화가 다수의 대중을 비인간적으로 내물았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인 제도임에는 확실하다. 중세의 신중심 사회에서 봉건제는 소수의 영주와 교황 및 성직자가 권력과 부를 확대 재생산하도록 기능했으며, 그 외의 인간들에게는 가장 비참하고 억압적인 지배체제이었던 것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