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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제1장 고대교육 1. 나. 그리스철학자의 교육사상 ①

by 정 그릿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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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크라테스의 인본주의적 교육사상

  (1) 생애

 소크라테스는 BC 470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나 BC 399년경까지 살았던 철학자이다.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아테네 제국을 세운 델로스 동맹의 창설자 아리스티데스가문의 친구였다. 신비의 조각가 다이달로스가 소크라테스의 선조였거나 조각이 가업이었다는 플라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아버지가 조각가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서구 인간 교육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세 인물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가운데서 첫째 인물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그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 즉 소크라테스는 우주론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변에서 인간 생활의 성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로 철학의 초점을 옯겼다. 그는 도덕적 가치가 침식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기에 살면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 신저의 표어와 도덕적 용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윤리 생활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기이한 편이었다. 뚱뚱하고 키가 작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들창코이고 입은 컸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가 '내면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당대에 가장 곧은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따.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의 심성도 개선, 발전시키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또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그의 옷은 항상 같았다. 그는 신도 신지 않았고 웃옷도 결치지 않았다. 소피스트인 인티폰은 "그처럼 살아야 한다면 노예조차도 도망가 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주제 넘게 간섭 잘하는 인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시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이 되려고 그와 사귀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고 그 원칙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BC 423년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아테네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크세노폰은 그녀의 기질이 불같았다고 전하지만 그녀가 바가지 긁는 여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사색을 즐겼고, 원칙에 항상 충실했다. 그가 군대 생활을 할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공직이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편향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자는 권력자 아니토스로서, BC 403년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정의 두 우두머리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기소자는 별 볼일 없는 멜레토스였다. 기소 이유는 2가지, 즉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아테네 규칙에 따르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24시간 이내에 독배를 마셔야 하는데, 델로스로 신성한 배를 보내는 기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형 집행이 1개월간 미루어졌다. 그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면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크리톤이 탈출 계획을 꾸몄으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판결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판결은 법정의 판결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파이돈>에 잘 기술되어 있다.

  (2) 소크라테스의 교육사상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인격이나 이론은 주로 플라톤의 <대화편>과 크세노폰의 <회고록>에 근거하여 살펴본 것이다. 그는 모든 시간을 길거리와 시장, 특히 김나시온(고대 그리스의 단련장)에서 보낸 듯하다. 그는 전도 유망한 젊은이들의 모임에 종종 참여하기도 했지만, 정치가, 시인, 예술가의 본문, 옳음과 그름에 대한 생각, 관심거리 등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무지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자처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혜로운 자'라는 아폴로 신전의 델포이의 신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동료들로 하여금 무지를 깨닫게 하고 영혼의 선(善)을 위한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게하는 임무를 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가 확신하게 된 것은 선한 삶의 필수조건의 하나가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글귀는 사실 전통적인 그리스의 지혜와 관련이 있는 델포이 신전에 적혀 있는 격언이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 격언을 자신의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이 격언을 인간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특히 인간 자신의 지혜의 한계를 아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참된 의무라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지배층과 지식인들의 오만과 자만, 지식인으로 위장된 신념을 경멸하였다. 회의론자이면서 회의에 가득찬 질문을 제기했던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그의 신념에 따라 놀랄 만큼 꿋꿋하게 행동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면 다른 사람과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 나타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로부터 발견되는 교육적 특징을 요약하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의식 속에서 '도덕적 삶'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가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던 도덕적 삶은 '너 자신을 아는 일로부터'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선한 영혼(정신)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임을 일깨웠다. 또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간의 대화적 방법을 통해 인간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추구하면서 올바로 살아가는 철학과 방식을 깨우치려는 '각성'의 인간교육관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교육관은 도덕률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살아가야 할 방법을 지시하는 강제적인 교육철학이 아닌, 평등한 상호관계 속에서 대화를 통해 무지에서 애지(愛知)의 새로운 삶으로 안내하는 인간교육의 철학과 방법을 포함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교육적 사고는 궁극적으로 아테네라는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려는 것으로 보아, 도덕적 공동체 형성이라는 교육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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